올해 들어 건설업계에서 찬바람이 유독 심하게 불고 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문제로 공사음이 멈춘 개발 사업장이 적지 않다. 지방에선 미분양이 쌓이고 있다. 초고령사회로 빠르게 들어서고 있지만 시니어를 위한 주택은 턱없이 부족하다. 국토교통부가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정책 수단이 리츠(부동산투자회사)다. 프로젝트 리츠와 기업구조조정(CR) 리츠, 헬스케어 리츠 등이 가동을 앞뒀다. 리츠가 부동산 시장 ‘구원 투수’로 떠올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리츠 자산 100조원 돌파 눈앞
리츠는 여러 투자자에게서 자금을 모아 자산의 70% 이상을 빌딩과 주택 등 부동산에 투자한 뒤 이익의 90% 이상을 배당하는 회사다. 투자자에게 리츠의 장점으로는 수익성과 투명성 등을 꼽을 수 있다. 작년 말 기준 국내 리츠의 평균 배당수익률은 7.2%다. 개인도 리츠를 통해 오피스 등 고가의 우량 부동산에 간접 투자해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다. 리츠는 발행주식 총수의 30% 이상을 일반의 청약에 제공할 의무가 있다.
리츠는 국토부로부터 영업 인가와 관리·감독을 받는다. 주식회사인 만큼 주주총회를 거쳐 중요 의사결정을 하고, 주요 사항은 공시한다. 리츠 운용을 담당하는 자기관리리츠와 자산관리회사(AMC)는 5명 이상의 상근 전문인력을 둬야 한다. 투명성과 전문성을 제고하는 장치다.
1960년 미국에서 리츠 제도를 최초 도입했다. 국내에는 2001년 첫선을 보였다. 지난 8월 기준으로 국내에 총 388개 리츠가 있고, 전체 자산 규모는 99조1440억원이다. ‘리츠 시장 100조원’ 시대를 눈앞에 뒀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리츠로 부동산 개발 선진화”
국토부가 내놓은 ‘리츠 활성화 방안’ 가운데 업계 기대가 가장 큰 것은 프로젝트 리츠다. 리츠가 부동산 개발에 직접 뛰어들 수 있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대부분 개발 사업은 시행사가 3%가량의 자기자본을 확보한 뒤 금융권에서 대규모 PF 대출을 일으켜 사업 자금을 충당하는 형태로 이뤄진다. 기존 프로젝트금융투자회사(PFV)에서 리츠 방식으로 개발 패러다임이 바뀌면 부동산산업 선진화를 꾀할 수 있다는 기대가 적지 않다.
리츠로 연기금이나 금융사 등의 자금을 끌어들여 자기자본비율을 30% 안팎으로 높이면 외부 변수와 상관없이 사업을 안정적으로 끌고 갈 힘이 생긴다. 금융비용 역시 대폭 아낄 수 있다. 대출이 줄어들고 금리 인하도 기대할 수 있어서다. 무엇보다 단순히 분양 수익으로 ‘한탕’을 노리는 방식이 아니라 향후 운영 수익까지 염두에 둔다.
프로젝트 리츠는 ‘지역상생리츠’와 맞물려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지역상생리츠란 특정 지역 거주민에게 우선 공모를 허용하는 리츠를 일컫는다. 데이터센터와 물류센터는 꼭 필요한 시설이지만 주민이 기피하는 시설이란 공통점이 있다. 이 시설들을 건립해 나오는 운영 수익을 거주민이 우선 배당받을 수 있도록 하면 ‘님비’ 현상을 줄일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존 PFV 방식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장에도 프로젝트 리츠를 소급 적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건의가 많다”고 했다.
지방 미분양 주택을 할인가에 사들여 임대주택 등으로 운영해 수익을 내는 CR리츠도 관심을 모은다. 부동산 시장이 회복될 때 매각할 수 있다. CR리츠의 사업성을 높이기 위해 취득세 중과 배제, 종합부동산세 합산 배제 등의 혜택을 준다. 예컨대 기존 12%인 취득세율이 1~3%로 낮아진다. 미분양 주택을 담보로 대출받을 때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보증도 해준다. 조달금리는 연 12~13% 수준에서 연 5% 수준으로 낮아진다.
국토부가 4월 CR리츠 사전 수요조사를 한 결과 약 5000가구가 접수됐다. 비수도권 ‘준공 후 미분양’이 1만3640가구(8월 기준)인 점을 감안할 때 수요가 높은 편이다. 최근 전남 광양의 미분양 497가구를 사들이는 ‘1호 CR리츠’가 나왔다. 매입 후 임대주택을 운영할 때 별다른 임대료 규제는 적용되지 않는다.
시니어주택 공급에도 리츠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경기 화성 동탄신도시에 국내 최대 시니어타운을 조성하기 위한 첫 헬스케어 리츠 인가가 연내 이뤄질 예정이다. 전세사기 사태와 전셋값 급등 현상이 맞물리며 서민과 중산층이 장기간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주거의 필요성도 새삼 커졌다. 공공 지원 민간임대와 20년 이상 장기 민간임대를 공급하는 데도 리츠가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귀농·귀촌 주택 개발을 위한 리츠도 있다. 도시재생사업 분야 역시 리츠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내년 150조원까지 성장 예상
정부는 리츠 관련 규제를 확 풀기로 했다. 헬스케어와 데이터센터, 태양광·풍력발전소 등 다양한 자산에 리츠가 투자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그동안엔 리츠가 시행령에 열거된 자산에만 투자할 수 있어 76%가 주택과 오피스에 집중됐다. 리츠 방식 사업자에게 공공택지 업무·상업용지를 우선 제공한다. 투자자가 월 단위로 배당받는 길도 열린다. 리츠가 우량 자산을 담으려면 실탄을 두둑이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자산재평가 및 인수합병(M&A) 활성화, 배당유보 허용 같은 카드도 꺼내 들었다.
기업이 미분양 물건을 계속 보유하고 있으면 부채로 잡히지만, CR리츠에 넘기면 자본으로 계산돼 회계 구조가 깨끗해지는 장점도 있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와 GH(경기주택도시공사) 등이 너도나도 리츠 사업에 뛰어드는 배경이다. 정병윤 한국리츠협회장은 “금리가 인하되고 관련 규제가 완화되면 내년엔 국내 리츠 자산이 최대 150조원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인혁/박진우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