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그 주변을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보존지역)으로 지정한 구역 밖에선 지방자치단체 재량에 따라 개발 규제를 완화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이에 따라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 맞은편에 자리해 고층 건물을 지을 수 없었던 서울 종로 세운상가의 재개발에도 탄력이 붙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보존지역 밖 개발은 지자체 재량”

대법원 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023년 9월 서울시의회가 의결한 ‘서울시 문화재보호 조례 일부개정안’을 무효로 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6일 원고 패소 판결했다. 소송이 제기된 지 약 2년 만에 나온 결론이다. 지자체가 제정한 조례의 법령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소송은 대법원 단심제여서 이날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2023년 개정 전 조례(19조)에 따르면 국가지정문화재의 외곽 경계로부터 100m(지정문화재 등은 50m) 이내는 보존지역으로 지정된다. 인허가 전 보존지역 내부는 물론 구역 밖에서도 건설공사 등이 문화재에 미칠 영향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면 인허가를 재검토하도록 했다.
그러다가 서울시의회는 “이 같은 조항이 상위법인 문화유산법에서 위임하지 않은 과도한 규제”라며 이를 삭제하는 개정안을 의결했고, 서울시도 이를 그대로 공포했다.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은 개정 조례가 문화유산법에 위배된다며 시의회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대법원은 시의회 측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문화유산법은 보존지역을 초과하는 범위에서까지 문화유산 보존 영향 검토 절차를 거치거나 조례 개정 시 국가유산청과 협의하도록 규정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보존지역 범위를 정하는 단계에선 국가유산청과 협의해야 하지만, 보존지역을 초과하는 지역까지 협의 의무를 정한 것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보존지역 밖에서 이뤄진 공사로 문화재가 훼손·멸실·수몰될 우려가 있을 땐 현행 법령 아래에서도 국가유산청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며 “문제의 조항을 삭제한다고 해도 문화재 보호에 차질이 초래된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서울시 “종묘 돋보일 녹지축 조성”
이번 판결로 종묘 인근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에도 청신호가 켜졌다. 2004년 정비구역 지정 이후 20년 넘게 첫 삽을 뜨지 못하고 있는 4구역은 이미 입주까지 마친 3구역, 6-3구역 등과 달리 최고 높이를 둘러싼 서울시와 국가유산청 간 갈등으로 사업 진척이 유독 느렸다.
1995년 종묘가 세계유산에 등재될 당시 유네스코는 ‘경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인근 지역에서의 고층 건물 인허가는 없음을 보장할 것’이란 조건을 달았다. 국가유산청은 이를 근거로 4구역에 들어설 건물의 최고 높이 기준을 71.9m로 설정했다. 시행사와 주민은 크게 반발했다. 4구역이 종묘로부터 약 180m 떨어진 보존지역 밖이므로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개발업계에 따르면 사업 지연으로 이 지역 주민이 지출한 누적 금융 비용만 6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서울시는 지난달 높이 규제를 71.9m에서 141.9m로 완화(청계천변 기준)하는 재정비촉진계획 결정을 고시했다. 이를 두고 세계유산인 경기 김포 장릉 주변 개발을 놓고 국가유산청과 시공사가 소송전을 벌인 ‘왕릉뷰 아파트’ 사태가 재연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시 관계자는 “최고 높이를 규제할 법적 근거가 없는데도 사업자에 무조건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며 “원래 ‘180m 이상’도 가능하지만, 문화재와 인접한 걸 감안해 ‘145m 이하’라는 타협점을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는 “(세운4구역에) 종묘를 더욱 돋보이게 할 대형 녹지축 형태의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며 “문화유산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는 동시에 도심에 활력을 불어넣는 사업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내년 착공해 2030년 완공이 목표다.
장서우/이인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