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전셋값이 상승하는 추세인 만큼 세입자가 계약갱신청구권을 쓰는 게 이득이죠. 하지만 보증금을 더 주면서 갱신권을 쓰지 않는 경우가 부쩍 늘었습니다." (서울 마포구 A 공인 관계자)
갱신 계약에서 보증금을 5% 이내에서 올릴 수 있도록 제한한 전·월세 계약갱신청구권 제도가 전셋값이 크게 오르는 상황에서도 세입자에게 외면받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26일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6월 28일부터 이달 22일까지 체결된 서울 아파트 전·월세 거래는 3만1071건이다. 이 가운데 갱신 계약은 1만2609건을 차지했는데,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하지 않은 비중이 절반에 가까운 47.2%에 달했다.
전셋값 치솟는데…세입자들 "보증금 그냥 올릴게요"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지난주(18일 기준) 전주보다 0.05% 상승했다. 전세수급지수도 101.7로 전주 101.6보다 높아졌다. 수요와 공급 비중을 점수화한 전세수급지수가 기준선인 100보다 높을수록 공급보다 수요가 많다는 의미다. 부동산원 관계자는 "역세권과 대단지 등 선호 단지를 중심으로 매물 부족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며 "전셋값 상승세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월세 계약갱신청구권 제도는 가파른 보증금 상승에서 세입자를 보호하고자 도입됐다. 전셋값이 내리는 임차인 우위 시장에서 쓸모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전셋값이 크게 오르는 상황에서도 세입자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있다.
전셋값이 오르는 만큼 세입자 입장에서는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하는 편이 보증금 부담을 줄이면서 주거 안정성을 높이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일선 중개 현장의 분위기는 달랐다. 마포구 A 공인 관계자는 "갱신권을 쓰는 비중은 반반"이라며 "전셋값을 1억원 가까이 높이면서 갱신권을 아끼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마포구 염리동 '염리삼성래미안' 전용면적 59㎡는 지난 22일 5억8000만원(11층)에 전세 계약을 갱신했다. 이전 보증금 4억9000만원에 비해 9000만원 오른 액수다. 대흥동 '마포태영' 전용 84㎡도 지난 22일 7억4000만원(2층)에 전세 계약을 갱신했다.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했다면 보증금 상승액을 3000만원 수준으로 낮출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대신 보증금을 7000만원 높였다.
A 공인 관계자는 "가뜩이나 서울 전세 매물이 급감하는 가운데 6·27 대출 규제(6·27 부동산 대책)로 매물은 더 줄고 전셋값은 치솟을 것이란 우려가 있다"며 "차라리 지금 전셋값을 올려주고 2년 뒤에 재계약할 때 갱신권을 쓰는 편이 낫다는 세입자가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2년 뒤엔 더 오를텐데…한 번 뿐인 갱신권 최대한 아껴야"
실제 6·27 대출 규제 이후 서울 아파트 시장에서는 전세 매물만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부동산 앱 리치고에 따르면 지난 23일 기준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은 2만1602건으로 6·27 규제 발표 당시(2만4274건) 대비 11% 감소했다. 같은 기간 매매(7만6162건→7만6210건), 월세(1만7914건→1만7899건) 물건에 큰 변동이 없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미 아파트 입주 물량 우려로 전세 매물이 감소하던 가운데, 규제로 인해 감소 폭이 한층 가팔라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울 아파트 전세 물건은 2년 전인 2023년 8월 23일 3만1183건에서 지난해 2만6893건으로 13.7% 줄었고 지난해 8월 23일부터 올해 6월 27일까지는 9.7% 감소했다. 1년에 10% 안팎으로 줄던 매물이 약 두 달 만에 10% 넘게 쪼그라든 셈이다.
아파트 입주 물량도 적정 수요에 크게 못 미칠 전망이다. 부동산 빅데이터 플랫폼 아실은 올해 4만6000가구에 달했던 서울 아파트 입주 물량이 내년 4100가구, 내후년 1만가구 수준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여기에 더해 6·27 대책으로 실거주 요건이 강화되면서 신규 입주 물량이 전세 매물 증가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기도 한층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서울 곳곳에서 2년 뒤를 기약하며 전세 갱신 계약에서 보증금을 크게 올리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다. 강동구 명일동 '삼익그린2차' 전용면적 84㎡는 4억1000만원이던 전세 보증금을 5억1000만원(5층)으로, 영등포구 양평동 '양평한신' 전용 84㎡도 보증금을 5억5000만원에서 6억5000만원(17층)으로 1억원 올렸다. 강서구 마곡동 '마곡13단지힐스테이트' 전용 84㎡도 최근 전셋값을 6억5000만원에서 7억9000만원(10층)으로 1억4000만원 높여 갱신했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임차인들이 계약갱신청구권 사용을 미루는 현상을 이례적이라고 평가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전셋값이 2년 전보다 떨어지지 않는 이상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면서 "보증금을 올려가면서까지 계약갱신청구권을 아끼는 것은 임차인들이 시장의 수급 불균형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이어 "서울 아파트 입주 물량이 역대급으로 줄면서 내년과 내후년에는 전세난이 더 심각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