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의 고강도 대출 규제가 재건축·재개발 사업지의 이주비 대출에도 그대로 적용돼 이주를 앞둔 조합원 사이에 비상이 걸렸다. 서울 강남 지역 고가 아파트조차 이주비 대출 한도가 6억원 이하로 제한되고 2주택자는 아예 이주비 대출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금 조달 문제로 정비사업에 제동이 걸려 안 그래도 위축된 서울 도심 주택 공급이 차질을 빚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30일 정비업계와 서울시 등에 따르면 올해 3월 기준 사업시행인가를 마치고 관리처분인가를 앞둔 사업지는 53곳, 4만8339가구에 이른다. 용산구 한남2구역, 강남구 개포 주공6·7단지, 동작구 노량진1구역, 송파구 가락삼익맨숀 등이 포함돼 있다. 이들 사업지는 아직 관리처분인가를 받지 못해 모두 이번 대출 제한 대상에 해당한다.
이번 대출 규제로 서울 주요 정비 사업지 조합원은 이주 계획에 큰 차질을 빚을 것으로 보인다. 가구당 20억원 가까운 이주비를 받아 온 강남권 재건축 단지와 한남2구역 등 강북 재개발 지구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강남 지역의 한 재건축 조합장은 “최대 6억원을 받아도 강남권에서 전세를 구할 수 없다”며 “조합원 대부분이 은퇴해서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을 적용하면 6억원도 못 받는다”고 토로했다.
오래된 빌라 등으로 이뤄진 재개발 사업지는 실거주하는 조합원(집주인)이 거의 없어 사실상 대출이 ‘제로(0)’가 될 처지다. 정부 관계자는 “집값 급등으로 인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며 “관리처분인가 후 이주까지 기간이 있으니 기존 주택을 정리하는 방식 등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2주택자 이주비 대출 '0'…한남2·개포주공 재건축 사업 '날벼락'
고강도 대출규제로 재건축·재개발 사업 '대혼란'
“최대 6억원이면 예상했던 이주비 대출금의 반 토막 수준입니다. 경기도 외곽으로 이사 가지 않는 한 집을 구할 수가 없어요.”(서울 송파구 A재건축정비사업조합 관계자)
정부가 서울 집값을 잡기 위해 고강도 대출 규제 정책(6·27 부동산 대책)을 내놓은 가운데 이주를 앞둔 재건축·재개발 사업지가 혼란을 겪고 있다. 이주비가 평균 6억원을 크게 웃도는 강남권과 강북 주요 재개발 사업지의 조합원은 자금 조달에 차질을 빚을 전망이다. 대출 정책이 주택 공급 급감을 불러올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 이주 앞둔 재개발 조합 ‘비상’
30일 정비업계에 따르면 용산 한남2구역, 강남 개포주공6·7단지, 동작구 노량진 1구역 등 53곳(4만8339가구)이 사업시행 인가를 마치고 관리처분 인가를 앞두고 있다. 이들 단지에 ‘이주비 폭탄’이 떨어지게 됐다. 내년 초 이주를 계획 중인 송파구의 한 재건축 조합 관계자는 “기본 담보인정비율(LTV) 50%에 추가 이주비까지 감안하면 10억원 넘게 나올 거라 생각했다”며 “이주 계획에 차질을 빚는 조합원이 수두룩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북의 B재개발 조합에도 지난 주말부터 조합원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이 조합 관계자는 “3층짜리 건물 1, 2층과 옥탑 등에 전세를 주고 3층에 실거주하는 조합원이 적지 않다”며 “본인 이주 비용은 고사하고 세입자에게 돌려줘야 할 보증금도 마련하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고 말했다. 다주택자 조합원은 이주비 대출을 한 푼도 받지 못해 더욱 애를 먹을 전망이다.

강남구 압구정 정비구역, 성동구 성수지구 등 아직 초기 단계인 정비사업 조합원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강남구 C재건축 조합 관계자는 “이주 시점이 1년여 남았는데도 이주비 대출 여부를 묻는 조합원의 전화가 쏟아지고 있다”며 “정부나 금융권에서 정식 공문이 내려오지 않은 만큼 일단 상황을 지켜보자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 “추가 이주비 감당 어려울 것”
통상 시공사가 조합원에게 추가 이주비를 제공하지만 이번 대출 규제에 따른 재정 부담이 개별 건설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라는 게 건설업계 시각이다. 서울 지역 재개발·재건축은 이주비 대출만 수조원에 이르는 데다 건설사도 이주비 대출을 위해 연 6% 안팎의 사업비 대출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 대형건설사 정비사업 담당 임원은 “이전까지는 강남 재건축 단지의 대출 한도가 LTV 50% 정도 나와서 조합원 90% 이상이 이주비를 자체 조달했다”며 “조합원의 기본 이주비 대출이 막히면서 이제는 건설사가 조합원 90%의 이주비를 빌려줘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종전자산평가액이 30억원인 강남 A아파트는 이전에 15억원까지 이주비 대출이 나왔지만 이제는 6억원의 상한이 적용돼 9억원을 추가 이주비로 제공해야 한다. 약 2000가구 규모라면 시공사가 2조원 가까운 금액을 투입해야 한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건설사도 이주비를 빌리려면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보증을 받아야 하는데 이자가 연 6% 수준”이라며 “일부 대형건설사를 제외하곤 사업비 대출을 감당할 곳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 일정이 늦어지면 결과적으로 공사 기간이 연장돼 조합원 부담이 커진다. 정비업계 관계자는 “엑시트(자금 회수)를 하려 해도 대출 규제 때문에 매수자를 찾기 힘들다”며 “이주도 매매도 막혀 사업이 장기간 공전하고 정비사업 동력도 크게 떨어질까 걱정”이라고 했다.
정부의 주택 공급 활성화 구상에 역행하는 만큼 이주비는 대출 규제에서 예외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동주 한국주택협회 상무는 “이주 절차 지연으로 정비사업이 차질을 빚지 않도록 대출 상한을 높이거나 이주비는 예외로 하는 등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심은지/이인혁 기자 summit@hankyung.com